권순왕 Qwon Sunwang, <가만히 있으라 Stay Put>, 개념판화Conceptual Printmaking, 서울환경운동연합, 2014
권순왕 Qwon Sunwang, <가만히 있으라 Stay Put>, 개념판화Conceptual Printmaking, 서울환경운동연합, 2014

[서울복지신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가라 앉고 있었다. 많은 승객들이 죽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방송으로 “가만히 있으라”하고 자신들은 도망갔다. 신 자유주의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걸까. 돈 앞에선 이웃도 승객도 없었다. 고도성장 앞에 늘 함께한 단어는 “가만히 있으라”였다. 잘 살기 위해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죽는 일이 어디 이번 뿐은 아니었다. 유사 이래 가장 풍요롭다는 지금, 세월호 참사는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있는 공통체의 분열이다.

이 작업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난 후 2014년 5월 초에 진행되었다. 세월호 침몰당시 많은 학생들이 세월호 안에 있었고 그 장면이 생중계 되었다. 그래서인지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나는 당시에 서울환경운동연합에서 지인을 만나기로 했다. 뉴스를 접하며 거기에 있을 때 그 마당에는 질경이와 민들레, 토끼풀등 잡풀이 뒤엉켜 자라고 있었다. 이 풀들과 마주친 순간은 푼크툼의 순간이었다.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푼크툼punctum은 찌름,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흠이며....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이 우연이다.”라고 했다. 이 침몰과 잡초에 대한 시점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 사태의 중첩이다. 이 풀들은 나의 눈에 가득 들어와 하나의 이 땅의 숭고한 생명이 침식된 것처럼 보였다. 이 풀들은 영원에서 날아 왔으며 지속될 풀들이다.

이 작업은 그 곳 마당에서 진행되었는데 잡풀이 무성한 것이 우리네 삶과 흡사 닮아 있었다. 그 잡초의 마당에 ‘가만히 있으라’는 이미지가 겹쳐졌다. 사고 당시 가장 강력하게 학생들을 지시한 단어였다. 나는 이 마당에 여섯 글자를 파기 시작했다. 조각도로 나무에 판각하듯이 “가만히 있으라”를 삽으로 잡초들을 파서 새겼다. 이 글자라도 파내지 않는다면 하는 설명할수 없는 감정의 연속이었다. 미디어로 목격한 뒤집힌 세월호에 아이들이 있었다. 그 당시 배 안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고 있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 글자만 아니었다면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자괴감이었다. 며칠 동안 이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 가학적 이율배반적인 행위는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억눌린 삶에 대한 상징으로 여겼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뒤집힌 배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없었다. 온 국민이 슬퍼한 대형 재난이었다. 특히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중에 사고가 난 것이어서 충격은 더욱 컸다. 학생들과 저마다의 사연들이 있는 사람들, 승객들과 세월호는 바닷속에 세월속에 잠겼다. 배의 목적지는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역사 속에서도 여러 가지 좌절과 분노와 희망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삼별초의 항쟁, 유배지, 레드 아일랜드, 신혼 여행지, 제주 올레길, 예술가들의 섬, 바람, 돌, 여자, 아름답던 신화가 있는 섬은 비극과 무관하지도 않다.

올해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재논의 된 4.3 70주기 행사 등 알고 보면 슬픈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산업화 이후 우리나라는 고속 성장을 이루었지만 사회 곳곳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사고당시 선장이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한 것은 현재도 사회 곳곳에 산재한 문제들과 엮여있다. 계산대 노동자 죽음의 비인간성, 대기업 가족들의 갑질, 사회 지도층의 비도덕성 등, 촛불이 만든 정부가 들어섰지만 아직도 민주화의 길은 멀기만 하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가 놓여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 강대국의 시스템 속에 놓여있는 우리의 억압된 현실과도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대지의 풀들은 다시 자라난다. 우리의 삶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픔을 돌아보기에는 바쁜 일상으로 시간은 흘러간다. 오늘도 다시 ‘가만히 있으라’는 강한 힘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대지를 판각하는 행위는 모든 불합리한 제도와 역사의 아픔을 몸으로 새기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 숭고한 생명의 지속성, 그것들을 뛰어 넘으려는 예술적 시도는 정말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로서 시대의 이미지로 기억될 것이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초빙교수 권 순 왕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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