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및 전시를 위한 프로그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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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복지신문]  중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읽는다기에 얼떨결에 따라 읽은 《노인과 바다》는 너무나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이런 책을 왜 고전이라 하지? 왜 퓰리처상이니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노인과 바다》는 내 인생에서 정말 재미없는 책으로 남았다. 그러다 마흔이 넘어 나간 독서모임에서 그 ‘재미없는’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곳에서 만난 ‘노인과 바다’는 너무나 달랐다. 도저히 같은 이야기라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대단한 이야기였다. 왜 그렇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아마 나 스스로 성장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감정들과 상황이 그 이야기에 이입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 단편적인 경험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나는 어린 나보다, 젊은 나보다, 나이든 지금의 나, 모든 것을 다 포용하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게 된 내가 더 좋다. 가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난 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다치고 흔들리며 아파한 시간과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 일곱 번이나 반복해 본 영화 ‘위대한 쇼맨’

올 봄 코로나19로 재개봉한 영화 ‘위대한 쇼맨’을 둘째아이가 보자고 하여 극장에서 처음 보았다. 줄거리야, 가난한 소년이 신분을 초월하여 부잣집 딸과 결혼한 후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사업적인 성공과 사회적 명성, 그리고 지위를 얻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된 사랑과 가족을 등한시하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재기하여 성공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투적인 이야기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는 놀랍게 다가왔고, 일곱 번이나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았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쇼맨은 신분이 낮고 가난한 하층민을 대표하는 반면, 그의 부인은 신분이 높고 부자인 상류층을 대변한다. 영화는 그들 외에 키가 매우 작은 사람(왜소증), 키가 너무 큰 사람(거인병), 피부가 너무 하얀 사람(알비노), 피부가 까만 사람(흑인), 털이 난 사람(다모증), 엄청나게 뚱뚱한 사람(비만), 서로의 몸이 붙은 샴쌍둥이, 성소수자(LGBT), 사생아 등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로부터 ‘다른’ 사람으로 배제되어 상처받고, 차별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등장해 그들이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 그려나간다. 평범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신기한 존재들을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쇼맨은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며, 배제된 그들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무대에 오른다. 그러나 그들은 놀잇감이 되어 무대에 오르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신을 찾아가고 자신을 받아들이고 결국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주눅 들고 두려움에 떨며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던 그들이 처음 사람들 앞에 나서자 거센 항의와 배척을 받고, 증오와 두려움에 떤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하는 연대를 통해 그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나가며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 그런 그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굳건히 홀로서기를 하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모습을 녹여낸 ‘This Is Me’ 라는 곡이 나올 때 나는 나의 과거를 마주하는 것만 같아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 내 어머니는 화교, 지체장애인이시다

내 어머님은 대한민국 사회의 소수자인 화교이면서 동시에 지체장애인이시다. 이중의 소수자인 셈이다. 어린 시절 나는 이 사실이 참으로 부끄럽고 힘들었다. 지금이야 세상이 좋아져서(?) 화교나 장애인에 대해 대놓고 무시하고 멸시하지 못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사람들은 철가방, 짱개, 땟놈, 절름발이 같은 모욕적인 언사를 공공연하게 내뱉었다. 그런 사회적 시선이 나의 청소년기를 힘들고 괴롭게 했다.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뚱뚱한 다모증 여성이 부르는 ‘This Is Me’의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이 어둠이 익숙해. 사람들은 내 흉한 모습이 보기 싫다고 숨으라고만 해. 나는 내 모든 상처를 부끄러워하며 살았고, 사람들은 아무도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

그랬다. 나도 그녀처럼 그때는 괜히 잘못을 한 것처럼 부끄럽고 주눅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니라고 넘길 만한데도 그때는 그랬다.

엄마를 “마마(중국어 엄마 명칭)”라 부르는 것에 대해 초등학교 친구들이 물어볼 때, 엄마가 내 팔을 붙잡고 절뚝거리며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쳐다보는 그 눈빛이나 분위기 때문에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그 과정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다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심리적 고통의 깊이는 무척 깊고 힘들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상담학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었다. 영화 마지막에 그들은 합창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 때문에 주저 않지 않을 거야. 우리도 당당히 살 자격이 있어. 우리를 위한 공간도 있어. 우린 멋진 존재들이니까! 난 용감하고 당당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 기다려 내가 갈게. 난 내 리듬에 맞추어 행진할 거야. 나는 남들의 시선 따위 두렵지 않아. 그리고 그들에게 사과하지도 않을 거야.”

과거의 나는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추이는 내 모습과 달리 나는 당당하지도,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진정한 자신감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내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니, 그 사실 자체가 오늘의 나,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그 과정이 분명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잘 견뎌온 내 자신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래서 ‘This is me’의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이 내 마음에 와 닿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내가 극복하고 승리하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그들이 갖지 못했다 해서 함부로 업신여기고 배제시키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너와 내가 다름으로 경계 짓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180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그 영화 속 차별은 2020년을 살고 있는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위대한 쇼맨은 현재 진행형이다. 쇼는 계속 되어야 하지만, 그들만의 쇼가 아닌, 우리들 모두의 쇼가 되어야 내용도 풍부하고 아름다운 쇼가 될 수 있음을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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