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균화/ 명예회장, 주필, 교수
정균화/ 명예회장, 주필, 교수

[서울복지신문] 휴가철이다. “갑자기 휴대전화 배터리가 나갔는데, 잠시만 빌려줄 수 있을까요?” “이번에 가족과 캠프를 가려는데 버너가 고장 나서. 혹시 버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자동차가 갑자기 이상해 제가 이쪽 방면으로는 좀 많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이때 포인트는 이것이란다. 정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상대가 기분 좋게 들어줄 만한 가벼운 부탁이어야 한다는 것. 평소 껄끄러운 상대였던 당신이 뜻밖의 부탁을 하는 순간, 정적(政敵)이 친구가 되는 아름다운 화해의 모드가 펼쳐질 수도 있는 웃음이나 유머, 재치는 생활의 중요한 요소란다. 주변에 둘러보면 공부 잘 하고 똑똑했던 친구보다 즐겁고 유머러스한 친구가 인기를 끌고 사회에서도 성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지프 애디슨’에 따르면, 사교적인 성격의 영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웃지 않고 조소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교만한 익살로 타인의 명성을 먹칠하는 사람은 그에게 “독이 묻은 화살을 쏘는 것이다. 그 화살은 상처를 낼 뿐만 아니라 그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 덕과 인간성으로 순화되지 않은 위트는 그만큼 혐오스러운 것이다.”

말하자면 ‘위트’안에 숨겨진 사악한 가시를 제거하고 인간의 ‘선한 본성’에 적합한 유머를 구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우리가 고대에서 근대 계몽주의 철학을 거쳐 배운 웃음의 철학이다. 이렇듯 웃음은 현대사회에서 즐겁고 신나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성공키워드이다. 웃음 한마디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대화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웨스턴 처칠’은 훌륭한 정치인으로 웃음이 넘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달란트가 있었다. 그가 여든 살 때 파티에 참석해 재치 있는 유명한 유머이다. 한 부인이 반가워 인사하려다 처칠의 바지 지퍼가 열려 “어쩜 좋아요. 남대문이 열렸어요.” 그러자 처칠은 웃으며 “이미 죽은 새는 새장 문이 열렸다고 해도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요.” 이 말을 듣던 주변 사람들이 파안대소했다.

필자의 장모님은 101세이시다. 이분이 주로 사용하셨던 용어는 “웃어 죽겠어!”이다. 이 말 속에 평소 인생을 살아가는 풍미와 여유, 웃음 해학에 담긴 장수철학의 비법이신 것 같다. 말끝마다 항상 ‘~웃어 죽겠어’라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랬던 그분이 101세가 되셨다. 지난주 100세 생신 기념파티를 로스안젤리스 앨콧 요양병원에 가서 장모님 생일파티를 해드리고 왔다. 이 병원 종업원과 입원하신 분들께도 감사의 선물을 함께했다. 이 병원에 104세분이 최고령 생존자이시고 100세 되신 분이 세 분이나 더 있으시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하다.

잘만 웃으시던 장모님께서 옛 적 가슴에 맺힌 말씀만 되풀이하신다. 이제 그만 살아야지! 아픈 것도 없다고 하시지만 이제 너무 오래 살아 주님 품과 장인 품에 돌아가시고 싶으신듯하다. 예쁘고 고우신 웃음기는 사라지고 많이 마르시고 가슴에 맺혔던 기억들을 소환하여 덕담을 해주신다.

필자는 딸만 셋이다. 그게 장모님은 옛날 어른이시라 따님이 아들 못 낳은 것에 한이 맺히신 듯하다. 일생 한 번도 이런 표현 하시지 않던 그 어른이 이번엔 반복적으로 문안 들일 때 마다 필자가 아들이 없는 것에 미안하셨든지… ‘내가 너무 미안해’ 장모님은 당신 딸(아내)이 아들을 못 낳아주어 미안 하신단다. 아니 어머님이 왜 미안해하시냐고요? 저는 아들보다 딸이 귀하고 더 좋다고 말씀드려도 웃으시며 거짓부렁이란 듯 손사래를 치신다.

지난 얘기지만 막내딸을 순산하고 필자는 정관수술을 한지 오래다. 시대가 지나 세상 딸 셋이면 금 매달, 딸만 둘은 은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는 동메달, 아들 둘이면 목 메달이라고 하지 않든가? 이 모든 게 하늘이 주신 복이요 선물이고 감사의 씨앗이다. 자식 덕을 보는 시대는 지났다. ‘서방 복 없는 여편네는 자식복도 없다’는 말이 있다. 필자는 딸 복도 처복도 넘치니 이게 복에 복을 주시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 염려와 걱정 한줌의 욕심도 다 내려놓으시고도 그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삶은 끈을 놓기가 쉽지 않으셨나 보다. 어려운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고 마음의 갈등과 힘든 결정을 참고 견디신 장모님의 삶을 존경한다. 수고하신 삶에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과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한다. 귀국 전 문병기도에 살짝 눈물을 훔쳐다. 장모님! 오히려 제가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떠한 관계와도 같지 않다.그것은 삶 자체에 대한 우려를 넘는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지속적이고 비통함과 실망을 초월한다.”<제임스 E.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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